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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수능 수기

[수능 수기] 특전사 출신 30대 장수생이 200일 만에 정시로 카이스트(한국과학기술원 KAIST) 합격한 수능 기적 수기

by COCOTEA 2021.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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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중후반 혹은 30대 늦은 나이에 수능 준비하는 장수생, 초장수생들에게 전설의 레전드 수기중 하나입니다.

2021년 요즘에는 취업 그 자체가 어렵고 또 취업을 하더라도 대기업, 중견기업, 중소기업 직장인으로는 정년이 짧고 답이 없는 현 상황이기에 늦은 나이에 수능시험을 준비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최근 KBS 출신 김지원 아나운서도 돌연 아나운서라는 직장을 관두고 한의대 진학을 목표로 수능을 준비해서 화제가 되었죠. 현재는 공부 유튜브 '지원 보감'을 운영하며 수능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30대에 수능을 준비하는 게 아주 어려운 일이고 무모한 행동일 수 있어도 결국 입시에 성공을 한다면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일 뿐 아니라 세상과의 싸움에서도 승리를 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이 수기를 쓴 이장희 씨는 그 당시 한국과학기술원 카이스트 KAIST을 32세의 나이로 입학을 해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보다 더 놀라운 점은 대한민국 육군 특전사로 8년간 복무한 이후 준비하는 수능이라는 점이지요. 당시 MBC 공부의 제왕에 출현하여 카이스트에 입학하는 공부 꿀팁을 공유하기도 했습니다. 2021년인 지금도 20대 중후반이나 30대 초반에 수능시험을 친다는 게 정말 고민해야 하고 어려운 일인데, 무려 15년 전, 2005년에 그러한 도전을 하셨다니, 진짜 대단합니다.

카이스트 특전사 기적 수기를 보고 있는 수능을 준비하는 30대 여러분들, 혹은 30대는 아니더라도 20대 중후반의 장수생, N수생 분들 어려운 길, 꼭 성공하시고 의대든 치대든 한의대든 교대든 수의대든 어디든 원하는 대학 입학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하고 응원합니다.

특전사 출신 30대 장수생의 카이스트(KAIST) 합격 수기


※ 15년 전 수기라 과목별 공부에는 현재와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 그럼에도 공부 마인드, 공부 자세, 공부 방법, 시간 관리, 공부 계획 세우기 등의 핵심은 지금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 언어영역 = 국어영역, 수리영역 = 수학영역, 외국어영역 = 영어영역, 사회탐구영역, 과학탐구영역

수능 준비하는 1년 동안 이곳 오르비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었습니다.
공부하는 여러분들에게 누구나 열심히만 하면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드리고 싶어
이렇게 몇 자 적어봅니다...
대한민국 수험생 파이팅!!


■ 31살의 늦깎이 수험생... 대한민국 육군 특전사 중사에서 KAIST로....


2004. 12. 30. 모니터 앞에 앉아서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려놓고는 한참을 망설이고 있었다. 모니터에 나와있는 화면은 2005년도 KAIST 2차 모집 합격자 조회...라고 쓰여있었다. 조심스럽게 수험번호와 주민번호 이름을 입력한 나는 엔터키 위에 손을 올리고 다시 한번 숨을 가다듬었다. ‘실망하지 말자, 아직 서울대도 있고 포항공대도 있다’. 다시 한번 마음을 잡은 나는 힘차게 엔터키를 쳤다. “축 합격” 그리고 그 순간 새로운 인생이 시작됐다.

처음 공부하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 주변 사람들(현역 시절 부대원들)은 모두 의아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이도 30살 학교를 들어가면 31세에 하겠다는 공부도 이공계 기피 현상이 점점 심해지는 상황에 순수 자연과학을 하겠다 하니 모두들 이상한 눈으로 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당시의 나의 상황은 7년 6개월 동안이나 군 생활을 그것도 거의 몸으로 밖에 하는 것이 없는 특전사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상태였으며 입대 전에도 근 2-3년간을 책과는 담을 쌓고 있었으니 거의 10년간 학문과는 거리가 먼 곳에 있었었다.

다시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임용고시 봐서 선생님 하려고?", 아니면 “편입하려고 하냐?”, 등 지극히 현실적인 그리고 조금은 무시하는 듯한 질문을 하곤 했었다. 그러면서도 그것도 힘이 들 텐데 하며 경제도 힘든데 소방공무원 또는 경찰 공무원을 준비하거나 아니면 전역하지 말고 계속 군 생활을 하라며 혀를 끌끌 차곤 했었다.

물론 나도 그런 생각을 한때는 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공부를 다시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솟구치기 시작했고, 먹고살기 힘들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야 나중에 후회를 안 한다, 내 자신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나는 자신감이 있었다. 나는 나의 능력을 믿었고 또 나의 과거를 알기에 충분히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2004년 2월 28일 전역을 하게 되는데.....

전역(2월 말)을 앞두고 나는 인터넷을 통해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할 것인가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우연히 03년 12월(정확한지는 모름) 평가원에서 실시한 모의고사를 찾아 다운 받아서 나의 현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를 확인을 해봤다. 결과는 암담했다. 한 220점 정도였던 것 같다. 하지만 난 가능성을 느꼈다. 나의 과거 수능 경험에 비교했을 때 그때보다 더 여건이 좋다고 생각했다. 사실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어느 정도 공부를 하는 편이었지만 그 당시에 나는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음악에만 관심이 있었기에 고등학교까지 그만두고 그 길을 가려고 했었다.

그러나 현실의 벽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음악을 하더라도 대학에 가서 배우자’라는 마음에 검정고시를 보고 5개월 수능 공부 끝에 (95년) 상위 약 6%에 드는 성적으로 숭실대학교에 입학(특차 수석)을 했었던 경험이 있다. 물론 공부를 하기 위해 대학을 가는 것이 아니었기에 내 점수에서 장학금을 받을 곳을 찾아 숭실대를 간 것이었다. 그리고 그 후부터는 책과는 거리가 멀었다. 96년 입대를 해서 04년 2월까지 특전사에서 군 생활을 했기에 거의 10년에 가까운 공백이 있었지만 95년 때보다 시간도 더 많고 그리고 10년 전에 했던 공부가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으리라는 생각에 자신감과 가능성을 확인했다.

우선 너무 오랜 시간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서는 정보가 최우선이었다. 수능이 어떻게 치러지는지 시험문제는 어떤 식으로 나오는지 등등 그리고 나의 교육 수준은 고3으로 치면 거의 백지상태(근의 공식도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 였기 때문에 독학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종합반 학원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이곳저곳을 알아본 후 나는 어느 정도의 규모 이상이면서 집에서 통학거리를 고려하여 송파 청솔학원을 선택하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이기 때문에 왕복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다른 학원 등등의 단과를 수강하지 않은 이유도 그 시간에 자신의 공부를 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디에 유명한 강사가 있다고 먼 거리를 오가며 시간을 낭비하는 학생들을 볼 때마다 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곤 했었다. 전역 후 3월부터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정말이지 처음에는 암담하기만 했다. 근의 공식도 잊은 지 오래였고 인수분해조차도 난감하기만 했었다. 영어는 철자 틀리는 것은 고사하고 소유격과 목적격조차도 헷갈리곤 했으니 초기의 심적 부담은 정말 너무 컸다. 선생님들의 수업도 다른 학생들과는 달리 따라가기가 너무 힘들었다. 사실 초기 한두 달간은 수업 시간에도 거의 독학을 하곤 했었다. 그러나 두 어 달이 흐르자 그때부터 어느 정도의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이었다. 9개월이란 짧은 시간에 모든 것을 처음부터 해야 했기에 나는 나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을 공부에만 투자를 했다.

아침 6시 10분에 기상,
40분에 집에서 출발 7시 10분 학원 도착(가는 길에는 항상 영어 듣기 평가를 청취),
오후 3시 학원이 끝날 때까지 쉬는 시간도 점심시간도 공부,
3시 40분 집에 도착
집에 도착 후 손만 씻고 바로 책상,
언어 모의고사 1회를 풀고 답 확인까지(공부 초기부터 언어 점수가 80점대로 나올 때
까지 8절 문제집 총 8권을 매일 1회씩 풀었음)
약 2시간 소요되어 5시 40-50분 정도
잠시 휴식(담배 한대)
6시부터 9시까지는 영어(인강은 EBS문법강의만 들었음)
듣기 평가 모의고사 매일 1회(스크립트 확인과 단어정리까지 약 40분 소요)
처음에는 맨투맨 한번 완독 그 후부터는 계속 독해연습
9시에 저녁식사(뉴스를 보기 위해 밥 먹는 시간도 뉴스 시간에 항상 맞춰서 먹었음--
어머니에게 가장 고마워하는 부분)
밥을 먹고 나서 신문을 보면서 뉴스 계속 시청
스포츠 뉴스가 끝난 후 다시 책상
1시 취침 전까지 수학
자기 전에 담배 한 대
과학은 주말에만 조금씩, 다른 과목을 계획대로 모두 공부 후 남는 시간만큼만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친구들과 술 한잔
명절 때도 집에서 공부..

이상 대략적인 나의 공부 계획이었고 9달 동안 이대로 실행을 했다. 결국엔 시력도 나빠지고 허리 통증도 생겼으며 거북목 증세도 약간 생기고 배도 많이 나오고(사실 몸이 좀 좋은 편이었는데 다 망가짐) 연인도 떠나가고, 모든 것을 잃어가고 남은 것은 가족과 꾸준히 나를 응원해 주고 도와준 나의 친구들이었고 오로지 하나 늘어나는 것은 나의 모의고사 점수였다. 3월 모의고사는 너무 형편없는 점수라서 기억이 잘 안 나지만 4월 모의고사에서는 320점 정도가 나왔었다. 그런데 언어 점수가 54점이었다. 그때부터 언어 공부에 시간을 투자하기 시작하면서 매일 모의고사 1회분을 푸는 강행군을 시작하였다.

수학과 과학은 시간이 흐르면 어느 정도는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걱정은 안 했지만 문제는 영어와 언어였다. 대부분 사람들이 나이가 많은 사람은 언어를 잘한다고 하지만 나는 예외였다. 4월 모의고사 성적표를 받았을 때 같은 반 36명 가운데 언어 점수가 내가 꼴찌였다. 그리고 내 옆에 앉은 예비역 동생이 나랑 1점 차이로 바로 위... 그래서 나는 그 친구와 다음 모의고사에서 언어 점수 내기를 해서 진 사람이 코코팜 (내가 다니던 학원 자판기에서 가장 비싼 음료수) 일주일 내기를 했다. 그때부터 매일 언어 모의고사 1회씩을 풀기 시작해서 결국엔 70점 대가 나온 내가 이겨서 일주일 동안 매일 점심에 코코팜 하나씩을 헌납받았다.

그 후에 내가 더 많이 사주긴 했지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 그때 당시의 나는 상당히 고무되어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인 영어 때문에 나는 쉬는 시간이나 점심때면 맨투맨을 펴놓고 공부를 했었다. 사실 내가 학원에 들어갈 때 위에서 밝혔듯이 10년 전에 숭실대 수학과에 입학 당시 받았던 장학금 명세서를 보여주자 바로 2반으로(1반부터 성적순) 배정을 해주었었다. 만일 시험을 보고 들어갔다면 적어도 5-6반 정도 이상은 어려웠을 텐데 입학시험을 볼 때까지는 아직 전역을 안 했을 때라서 그냥 무시험으로 배정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사실 같은 반에서 공부하던 애들은 어느 정도는 기본이 있기 때문에 그사이에서 맨투맨 기본을 꺼내 들고 Fire burn(맨투맨의 첫 문장은 아직도 이 문장으로 시작된다)부터 다시 시작하는 내 모습이 창피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내가 반드시 너희들을 따라잡으리라는 다짐을 하며 책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래도 역시 영어는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었다. 단어도 외워야 했고 문장 구조 분석도 오랜 반복으로 얻는 것이었기에 그리고 듣기 평가의 어려움으로 인해 9월 정도가 돼서야 간신히 80-90점 정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4월 후반 정도부터는 어느 정도 수업을 따라갈 수가 있는 정도라서 수업에 맞춰서 공부 전략도 조금씩 바꿔가며 하기 시작했다. 어느덧 6월이 되면서 드디어 400점을 돌파를 하게 되는데......

6월 평가원 모의고사에서 407점이 나왔다. 드디어 400을 넘었다. 게다가 대부분 학생들이 매우 어려웠다고 했던 모의고사였기에 그때부터 조금씩 나의 목표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나의 노력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비록 원점은 407점이었지만 표점으로 치면 내가 이번 수능에서 얻은 점수에 거의 육박하는 점수였다. 나는 과목별로 다시 분석을 한 후에 공부 계획을 다시
수정을 하여 계속 꾸준히 정진하였다.

7월부터는 매일 1회씩 풀던 언어는 그만두고 정확히 푸는 연습과 취약점인 시, 소설 분야에 매진을 하였다. 영어는 듣기에서 이제 2-3개 이하로 틀리기 시작하면서 듣기 1회 풀고 나서 정리하는 시간도 많이 절약되어 30분 정도에 끝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독해와 문법을 중점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제 한 2시간 정도 독해 연습을 해도 모르는 단어 정리하는 개수가 40개 미만으로 나오기 시작하면서 영어에도 어느 정도 감이 오기 시작했다. 7월부터는 과학을 조금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른 과목은 몰라도 과학만큼은 만점을 받아야겠다는 계획으로 차근차근 노트를 정리하면서 체크리스트를 작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8월 모의고사에서 464점. 감격이었다. 언수과총점으로는 학원에서 1등이었다. 처음으로 성적표에 예상 지원 가능 대학란에 서울대와 약대 의대 등등이 표시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실수를 줄이고 사소한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세심한 공부가 필요한 시기였다. 과학은 꾸준히 체크리스트를 확인하며 반복을 하였고 수학은 문제를 깨끗이 정리하는 연습을 하였다. 수능 때까지 속을 썩인 언어와 영어는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하는 수밖에 없었다.

9월 평가원 모의고사에서 처음으로 점수가 떨어지는 쓰라린 경험을 하였다. 시험이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실수와 자만 등등이 겹쳐진 것이었다. 수능 전에 좋은 경험을 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꾸준히 마무리를 하였다. 9-10월 동안 여러 번 본 모의고사에서 모두 460점 대만 받으면서 점수가 정체가 되자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수능 전까지 꾸준히 정리하며 많은 준비를 하였고 결국 대학 수학능력시험에서 원점수 468을 받게 되었다.

수능이 끝나자마자 그동안 참아왔던 담배를 한 갑 사서 집으로 오는 동안 차 안에서만 반갑을 피웠다. 음악을 최대한 올리고 소리를 지르며(사실 이때 사고 몇 번 날 뻔했던 기억이..^^) 그동안의 쌓인 스트레스는 그 한순간에 바람처럼 날아갔다.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다녀왔다고 인사를 할 때는 목이 쉬어서 쇳소리가 났다. 오자마자 모니터 앞에 앉아서 답을 확인하고 점수를 매겨 보았다.. 468점. 사실 생각보다 적게 나와서 좀 아쉬웠다. 그리고 그 후 여기저기서 물수능이었다는 말들이 불거져 나오면서 KAIST 합격 소식을 들을 때까지는 정말 잠도 오지 않을 정도로 불안했었다.

점수만 확인한 후에 바로 집을 나왔다. 그동안 꾸준히 나를 도와주고 응원해 준 친구들과 술을 한잔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친구들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내가 가자마자 친구들은 점수를 물어봤다. 내가 점수를 말하자 기뻐하던 친구들의 모습은 정말 영화 속의 모습과도 같았다. 아니 그날 나는 정말 영화 속의 주인공이었다. 9달간의 고생을 날려버릴 듯이 소리를 치며 밤새 술잔을 기울였다. 그때 친구들 대부분이 다음날 늦게 출근을 해서 미안했지만 고맙고 기뻤다.

카이스트 면접 때 교수님께서 나에게 그러셨다. 처음에는 나이가 너무 많아서 합격을 시킬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셨다고, 일단 면접을 보고 결정하신다고, 난 나의 과거와 나의 공부에 대한 열정을 보여드렸고 그런 나를 교수님들은 인정을 해주셔서 합격시켜 주셨다.

이제 나에게는 죽을 때까지 공부하는 일만 남았다. 그동안 그냥 적당히 살려했던 나의 과거가 후회스럽기도 하지만 이제 다시 시작이다. 지금까지 어떻게 했느냐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남자는 자기 자신을 인정해 준 사람에게 목숨을 바쳐야 한다. KAIST가 나를 인정해 주고 나를 선택해 주었다. 이제 나는 카이스트에 대한민국의 과학발전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 과연 나에게 그런 능력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해야 한다.

해야 함은 할 수 있음을 포함한다.
나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국민소득 2만 불 시대를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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