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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수능 수기

[수능 수기] 실업계 자퇴, 검정고시 출신, 재수 삼수 사수를 거쳐 이과 수능 1등급 최상위 서울대 의대생이 된 수능 기적 수기

by COCOTEA 2021. 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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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업계 자퇴에 검정고시 졸업을 한 완전 노베이스 학생이 재수, 삼수, 사수를 거쳐 이과 수능 정시 1등급 최상위권으로 서울대 의대를 합격한 레전드 수기입니다. 수기를 쓴 시기는 장승수의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꽤 오래전 내용으로 추정되지만 (대략 20년 전) 수능 기적을 만들려는 마음가짐은 2022학년도, 2023학년도 수능에서도 통용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럼 서울대 의대 수능 기적 수기 시작합니다!

이 아이디는 이 글을 쓰는 본인 것이 아니라 제 사촌동생의 아이디임을 먼저 밝힙니다.

결혼식이 있어 내려왔는데 사촌동생의 부탁으로 짧게나마 수기를 써 봅니다.

 

그리고 참고로 이 카페에 소설 종류의 수기들이 올라온다는 것을 들었는데 혹시나 있을 그런 추측들을 대비해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는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영산농업고등학교 자퇴생 출신 서울대 의대 생임을 미리 밝혀 드립니다.

마을 나고 서울대 간 사람은 본인뿐이기 때문에 물어보셔도 금방 다들 아실 것입니다. 이름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나는 경산남도 창녕 영산이라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공부란 것에는 그저 관심도 없었고 마을 형님들과 아이들과 들판을 거닐며 뛰어노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다. 그러나 그해 고1이 되던 해에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장승수가 장안의 화제였다. 우연찮게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란 책을 접하게 되었고 그 단 한 권의 보잘것없다면 보잘것없는 책이 내 인생의 물줄기를 바꿔버리는 엄청난 계기가 되었다. 그때가 내 나이 고1이었다. 그 길로 나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영산농업고등학교를 자퇴했다.

그 뒤로 나는 정석 수학과 인문계 고등학교의 수능에 들어가는 모든 과목의 교과서를 동네 아는 형님의 친구를 통해 어렵사리 구해 내 방에서 독학을 시작했다. 시골마을에 가면 `요강`이란 소변을 받는 것이 있다. 나는 대변을 볼 때 말고는 소변도 요강에 누며 밥상 한 개위에 책을 쌓아 두고는 무조건 정석 수학과 고등학교 교과서를 보기 시작했다. 잠은 그 당시 한 하루에 5시간 정도 잔 걸로 기억된다 새벽 6시에 기상해 새벽 1시까지 오직 책만을 보며 살았다. 어머니께서 밥을 갖다 주어도 나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밥을 먹었다.

이런 생활을 내가 6달 남짓 하며 오직 책 만을 보는 내가 걱정스러웠던지 어느 날은 아버지께서 책을 감추어 버리셨다. 나는 생떼를 쓰며 책을 달라며 난리법석을 부려서 책을 받고는 다시 않아 책을 보기 시작했다. 그 당시 나는 공부방법은 물론이거니와 아는 것도 없었기 때문에 무조건 반복해가면서 책을 보았다. 아무리 독학이라 해도 반복되는 학습의 힘을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다. 나는 이 점을 강조하고 싶다. 내가 1년 넘게 밖에는 나오지도 않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책만을 보는 나를 마을 사람들은 거의 제정신이 아닌 사람 취급을 했다. 심지어는 `완전 도란놈아니가 점마` 이런 소리까지 듣기도 했었다.

나는 그다음 해 초에 대구로 올라가 검정고시에 응시해 아주 좋은 성적으로 합격했다. 내가 제일 처음 공부를 시작할 당시 수능을 치기 위해서는 고등학교 졸업자격인 검정고시를 합격해야 한다는 사실을 접하고서는 제일 처음 과년도 검정고시 기출문제를 풀어 보았는데 모든 과목을 합해 평균 45점 정도 나왔던 거 같다. 이후 나는 열심히 공부하여 검정고시에 합격함으로써 `확신`같은 것을 얻었다. `하면 되는구나.`란 확신을 말이다.

그 해에 재수를 해보고도 싶었지만 그럴만한 형편이 되지를 않아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방 안에서 독학을 했다. 그해에 수능에 응시했는데 나는 모의고사도 풀어본 적도 없거니와 수능은 처음 접해 보았었다. 검정고시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난이도와 이해력. 사고력을 요구하는 문제들이 태반이었다. 그때 내 수능점수는 210점이었다. 그 당시 나에겐 충격적인 점수였다. 나는 그다음 해 다시 수능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미리 말하지만 그 당시 나의 목표는 서울대 의대였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게 있다. 무슨 일이든 자신의 확고한 목표를 세우란 것이다. 목표를 세우고 공부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차이는 말할 필요도 없다. 목표과 있는 사람은 그 목표를 생각하며 의지를 불태우지만 막연히 공부하는 사람은 공부만 하게 된다. 나는 목표를 높게 잡으라고 말하고 싶다. 목표를 낮게 잡는다면 그 사람은 그 이상의 성과는 기대하기 어렵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집안에 돈이 없어서 뒷바라지가 안되니 난 안될 거야`

`솔직히 노력한대도 된다는 확신이 없어요`

`서울대 가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이런 식으로 자기를 합리화하는 사람들을 나는 많이 봐왔다. 이런 사람들은 사실은 그것이 아니고 내심은 언제나 불평과 불만. 핑계로 가득 차 있다. 무한한 가능성과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잠재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노력을 통해 끄집어내어 사용하려 하지 않는다.

 

내가 가장 안타까운 부분이 이런 부분이다. 인간의 뇌세포는 약 120억 개에서 200억 개 정도라고 한다. 모든 사람들은 이토록 방대한 수의 뇌세포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실제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3%~에서 4%라고 한다. 철학자와 같이 사물을 생각하는 것이 직업인 칸트 같은 사람도 보통사람들보다는 많이 사용했지만 그 역시 10%를 넘지 못했다고 한다. 천재 아인슈타인도 `이것이 내 능력의 한계이다`라고 할 만큼의 능력을 끌어내지는 못했다. 즉 이 말은 누구에게나 아직도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말이다. 그 가능성을 추구하는 것. 그것이 인생이 아닐까?

(첨언하자면, 실제로 인간은 뇌의 모든 부분을 전부 사용한다고 합니다. 위에 뇌세포에 관련된 글은 그냥 서울대 의대를 글쓴이가 한계를 넘어서 최대치로 머리를 사용하는 습관, 마음가짐을 가지는 게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강조하는 내용으로 보고 다음 문단을 읽으면 됩니다.)

 

장승수 씨가 그랬다. 자기로서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일에 도전한다. 그리고 피나는 노력을 통해 기어이 그 점수를 돌파해 버린다. 그리고 다음에는 더한층 목표를 높여 도전을 하고 성취한다. 이러한 행위의 반복이 그를 보통사람의 재능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서울대 수석합격이라는 결실을 만들어 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흔히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사람의 기분에 불과하며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순간 그것은 정말 불가능하게 되어 버린다.

본래 이야기로 돌아와 그다음 해에 다시 한번 도전하기로 마음먹고 그 당시가 지금 생각해보면 무모해 보이기도 했지만 독학을 시작했다. 그 결과 나는 그해 수능에 좋은 성적을 받아 경북대 경영학과에 합격을 했다. 경북대에 합격한 것일 뿐인데도 우리 부모님은 대단히 기뻐했고 친지를 비롯한 마음 사람들도 공부한 보람이 헛되지 않았다며 나를 칭찬해 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주위 사람들의 분위기 와는 다르게 침울했다. 나는 의사가 되고 싶었기 때문에 의대에 가고 싶었다. 그것도 이왕이면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의대에 가고 싶었다. 그렇기 때문에 서울대의대가 애초에 나는 목표였다.

나는 딱 잘라 재수를 하겠다며 여기에는 재수학원이 없으니 대구로 올라가 공부를 하겠다며 부모님께 금전적인 도움을 청했다. 그때 정말 갈등이 심했다. 부모님은 이런 시골에서 지방 국립대인 경북대에 합격한 것만 해도 어딘데 그냥 경북대에 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서울대 의대에 가겠다며 생떼를 썼고 기어코 나는 허락을 받아내고 말았다.

그때부터 나의 고생스러운 자취생활과 재수생활이 시작된다. 솔직히 시골 농사짓는 집에 돈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는가? 나는 한 달에 딱 50만 원 밖에 받을 수가 없었다. 자취방 월세와 끼니를 해결하고 나면 너무나 부족한 금액이었다. 최대한 돈을 아끼기 위해 나는 골방을 선택했다. 끼니도 대부분 라면으로 때웠다. 나는 모자란 재수 비를 메우기 위해 매일 새벽마다 신문배달을 시작했다. 다른 재수생들이 자는 새벽 3시 30분 나는 읽어나 자전거에 신문을 가득 실고 배달을 다녀야 했다.

한 번씩 우리 집이 부자였다면 이런 걸 안 하고 공부에만 몰두할 수 있을 텐데 하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나는 장승수 씨를 생각했다. 그렇다 대부분 어려운 사람들은 자기 케이스가 가장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자기보다 더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불평만 할 것이 아니라 그런 자신의 현재 현실을 받아들이고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이다. 이걸 알기 바란다.

재수학원을 등록할 때 학원 선생과 반 학생들과의 인사 때 저기 대학 목표를 말하는 순서가 있었는데 나는 서울대 의대라고 했다. 그러자 조그만 웃음소리들이 남발했다. 나는 이런 주위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는다. 내 할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서울대 의대를 갈려면 전국 200등 안에는 들여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실소를 머금었다. 솔직히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해에 정말로 열심히 공부해 수능에 응시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결과 나는 그 해 서강대에 합격했다. 주위에서는 예상 밖의 나의 성적으로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예상하겠지만 나는 서강대에 등록을 하지 않았다. 주위에서 시골에서 상경한 촌놈인 내가 서울대 의대는커녕 서울대조차 절대 가지 못할 거라고 단정 지었다. 그러나 나는 이런 개인의 가치관에서 나오는 말들이 우습다. 자신들이 신도 아닐뿐더러 미래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100% 확신한단 말인가? 이런 사람들치고 제대로 된 사람을 보지 못했다. 재수할 때 힘들다는 말을 많이 한다.

이성친구를 못 사귀어서 힘들다

혼자라서 힘들다

나이트를 가고 술을 먹지 못해 힘들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아직 철이 덜 든 사람들이다. 내가 머릿속에 늘 되뇌는 말이 있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다.`

 

그렇다 나는 하루 2끼를 돈이 없어 라면을 먹는 처지였지만 저 사람보다는 나았다.

`집안이 나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어릴 적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그렇다 우리 집은 농사를 가난한 농부 집안이었지만 이것보다는 나았다.

`너무 막막해서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다.`

나는 수능에 비록 3번이나 떨어지긴 했지만 저 경우보단 낫지 않는가? 저 말은 칭기즈칸이 한 말이다. 나는 힘들 때마다 머릿속에 저 말을 되뇌면서 힘든 것을 잊곤 한다. 그러나 나도 사람이기 때문에 재수할 때 정말 견디기 힘든 날이 있었다. 나는 한 달에 한번 돈을 받기 위해 영산으로 내려가는데 일을 너무 많이 해 굳은살이 박여버린 어머니의 손에서 한 달 생활비가 담긴 편지봉투를 받는 순간..

그리고 돈을주며 항상 `이것밖에 못줘서 미안하데이`.. 란 말을 듣는 순간 속에서 북받쳐 오르는 것을 참으며 나는 돈을 받아 들고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재빨리 서대구행 버스에 올라탔다.. 가는 길 그 돈 봉투 위에 눈물을 떨어뜨리며 나는 항상 생각했다. 나태해지지 않겠다고 결코 포기란 단어는 잊고 살겠다고 말이다.

21살 결국은 수능날이 다가왔다. 고사장에는 이미 어머니와 아버지가 도착해 계셨다. 벌써 4번째였다. 나는 아직도 내가 고사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때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물 맺힌 애타는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4년간 최선을 다한 결과 나는 그해 수능에서 0.1% 안에 드는 기적을 일구어 냈다. 남들은 기적이라고 말했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내가 공부에 바친 열정과 의지를 알지 못한다.

서울대 의대에 원서를 넣어 1차 통과를 하고 면접도 나름대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 었다. 이제는 합격 발표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합격 발표가 나는 그날 주인집 아주머니의 전화기를 통해 합격 발표를 확인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장승수 씨의 책에서 읽은 것과 같이 나도 그냥 멋있게 덤덤하게 웃어버려야겠다는 생각을 가끔씩 했었다. 그러나 막상 합격확인을 하고 나니 눈물을 내 앞을 가렸다. 그 길로 바로 대구 서부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영산행 버스를 타고 부모님이 있는 영산으로 내려갔다. 그 1시간이 그때 왜 그리 길던지...

내가 도착하자 합격소식을 들었는지 이미 부모님과 마을 이장님이 나와 계셨다. 내가 내리자마자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안았고 모든 사람들이 인물 났다며 과분한 찬사를 보내주셨다. 그 길로 마을에는 팸플릿이 걸렸고 나는 서울대에 합격했다는 것보다는 그제야 부모님께 할 도리를 했다는 생각에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나는 서울대 의대생이지만 여기에도 만만찮은 대가가 필요했다. 나는 서울대 의대생이 되기 위해 인생에서 가장 즐겁다고 하는 학창 시절과 20대 초반의 황금기를 고스란히 공부에 쏟아부어 버렸다. 그렇다. 세상에 노력 없이 얻는 것도 없거니와 `세상에 공짜도 없다` 나는 공부방법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정신상태`라고 생각한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공부에 임하느냐.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난 공부방법은 말하지 않겠다. 공부방법 정말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공부방법은 자기가 시행착오와 경험을 통해 스스로의 공부 스타일과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지 결코 상위권의 공부방법을 그대로 따라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장승수 씨의 공부방법을 모두 따라 해 모두가 서울대를 갔어야 할 것이 아닐까? 난 장승수 씨를 존경한다. 그 사람이 서울대를 수석 합격했다는 것에 존경을 표하는 것이 아니라 장승수 씨의 정신상태와 의지를 존경한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불가능한 일과 가능한 일이 있다. 한마디로 불가능한 일은 보통인간이 지구를 뛰어서 1초에 한 바퀴 돈다거나 이런 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누가 봐도 불가능이다. 그런데 과연 서울대나 소위 말하는 명문대 가는 것이 불가능할까?

보통 학생에게 `너 서울대 의대 합격하라.`이런다면 대부분의 반응은 `제가 어떻게 해요?`이런 반응을 보일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인생을 실패한다. 왜 실패할까? 그것은 앞의 저 케이스는 `노력도 해보지 않고`포기한다. 이것이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의 차이를 결정짓는 것이다. 노력하면 반드시 올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실패하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노력해도 실패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럼 대체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이것은 왜 그런가 하면 `포기`하기 때문이다. 포기만 하지 않고 정말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을 만큼 노력한다면 나는 그 사람이 원하는 대학에 올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다. 정말 최선을 다하면서 그 중간에 몇 번의 좌절을 겪었을 때 `포기`하는가 안 하는가가 그 사람의 성공과 실패를 좌지우지한다.

장승수 씨 같은 예를 보라. 장승수 씨는 3번이나 떨어졌으나 4번 만에 포기하지 않고 최선의 노력을 다해 서울대 수석합격을 했다. 만약에 3번 떨어졌을 때 포기했다면 서울대 수석합격의 장승수 씨는 아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말을 들은 것이 있다. `서울대는 선택받은 수재만이 간다.` 나는 저 말을 이렇게 해석한다. `서울대는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사람들만이 간다` 서울대생들은 서울대를 우수한 수재들의 모임이 아니라 성실하고 부지런하며 최선의 노력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 자부한다. 흔히들 서울대생들을 보면 `머리가 좋을 거야`이렇게 생각하는데 인간은 아인슈타인 같은 희대의 천재나 바보가 아닌 이상 거기서 거기다. 나는 이 점을 정말 동감한다.

그럼 뭘까? 흔히 공부 잘하는 사람들은 아주 어려서부터 공부를 시작한 경우가 많다. 다른 것도 그렇듯이 사람의 머리도 쓰면 쓸수록 사고력과 이해력이 증가한다. 그렇기 때문에 남보다 일찍 시작한 학생은 머리를 그만큼 많이 써주었기 때문에 보통 학생들과 두뇌회전의 편차가 생기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말할 것은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는 사람들에게 얄랑한 희망 따위나 주려고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 그대로를 쓰는 것이다.

 

선배 재수생으로써 말합니다.

잠시 힘들 뿐 이 역경과 극적인 어려운 환경을 포기하지 않고 이겨내는 사람만이 인간승리의 인생역전 드라마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 실업계 출신, 검정고시 졸, 경북대 경영학과, 서강대를 거쳐 사수 때 이공계 정시 수능 상위 0.1% 서울대 의대생으로, 기적의 수능 기적 수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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